" 흐응, 강류. 어제부터 왜 그래?? "
" 뭐가... "
" 아니, 뭐랄까. 왠지 수심에 잠겨있는 늙은이...아야얏! "
" .....죽을래.. "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오공의 머리를 쥐어 박고서야 잠잠해 진다.
4교시의 음악실로의 이동수업이라 꽤나 분주한 가운데, 어제 먹은 술 탓인지-(주)미성년자입니다;-아니면,
어제의 홍해아 일이 마음에 계속 걸리는 탓인지 몰라도 기분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그런 내 모습에 쭈뼛거리며 살살 애교를 부리는 오공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지만서도.
" 그나저나..음악실이라면..5층 맨 끝이지? "
" 응, 아마 그럴껄? 이제 거의 다 왔어. "
" 5층 맨 끝이라면...설마. "
" 에?? "
" 강류! "
" 젠장. "
등 뒤를 돌아보니, 역시 목소리의 주인공은 샐쭉하니 웃고 있는 홍해아.
젠장, 현재로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 중 하나였는데, 음악실이 홍해아 녀석의 반 근처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은
머리를 원망하며 나는 굳어진 얼굴을 애써 풀려 노력했다.
" ...왠일이냐. "
" 에, 바로 이 앞이 우리 반인걸.
아, 오공이라고 했었지? 너.. 난 홍해아라고 해. 우리 구면이지? "
" 에, 어... "
넉살좋게 웃으며 덥썩-손을 잡고 흔들어대는 홍해아에 저번의 이미지와는 전혀 틀려 당황한 듯 얼떨떨한 얼굴의 오공.
전날 밤의 불길함과는 달리 평소 모습 그대로의 홍해아녀석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며 난 아직도 잡고 있는 오공녀석과 홍해아의
손을 떼네었다.
" 음악실 가야돼. 종 치겠다. "
" 에에- 맞다! 음악실!! "
" 흐음, 너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
" 할 말? "
의아스럽게 녀석의 쳐다보자, 녀석의 입꼬리는 보기좋은 호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얼핏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상냥하다고 말하겠지만, 녀석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에겐 저 미소가 무언의 압력으로밖엔 보이질 않았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오공녀석에게 음악책을 떠밀었다.
" 먼저 음악실에 가 있어. "
" 우웅...알았어!! "
입을 샐쭉히 내밀 것 같던 녀석은 음악실 쪽으로 금세 달려갔고,
조용해진 복도에는 홍해아 녀석과 나, 둘 뿐이었다. 쉬는 시간인데 이상하군-너 때문이야;-
" 할 말이 뭔데. "
" 오늘 성원이랑 한 탕 하러가기로 했는데.
전력이 모자랄 것 같아서 말야. 도와 달라구. "
" .......다시 사고쳤다간 본가[本家]에서 귀찮게 할 텐데. "
" 아아, 그 문제라면. 염려 마. 내가 손 쓸테니깐. "
" 흐음, 몇 시에? "
" 7시에 전화할 테니. 나와. "
" ............................할 수 없군. "
왠만해선 그런 일 부류엔 날 끌어들이지 않는 녀석을 잘 알기에
하는 수 없이 승낙해 버렸다. 홍해아 녀석의 부탁은 꼭 필요한 것만 하기 때문에 거절하기 곤란하다.
아니면, 내가 똑 부러지게 녀석을 밀어내지 못하는 걸지도.
" 아,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오공도 같이 와 줬으면. "
" 오공은 왜?? "
난데없는 녀석의 부탁에 삽시간에 굳어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잠시 흐려지던 녀석의 얼굴은
이내 씁쓰름한 웃음으로 마무리지어진다.
" 맘에 걸리는 게 있어서 조사 좀 했지. "
" .......뒷조사를 했다는 거냐? "
" 아아, 굳이 깊게 파고들진 않았어. 전학을 온 사유가 알고 싶었달까. "
" 그래서, 원하는 건 찾은거냐. "
" 그래, 아주 흥미로웠지...궁금하지 않아? "
" 그래, 뭘 찾았는지 아주 궁금하군. "
" 그 녀석,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큰 일을 내고 쫓겨오다시피 이리로 왔더군.
뭐, 들어오기 어려운 이 학교로 왔으니 쫓겨났다기 보다는 횡재한 걸 수도 있지만서도.. "
" 큰 일?? "
" 같은 반 녀석의 얼굴을 거의 뭉개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손 봐줬더군. 으음, 상대편은 전치 10주의 큰 부상. 그것도 주먹 하나로만 그래놨다니.
그 순진한 얼굴에 맨날 방긋방긋 웃고 있어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
나는 아무말 없이 홍해아 녀석의 웃는 얼굴을 노려보았다.
나에게 이런 것들 따위를 가르켜주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공이 그런일로 전학을 왔다는 사실이
조금은 뜻밖의 일이었지만. 이런 것들 따위가 저 녀석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건지.
" 적어도, 네 녀석은..자기 이득이 되는 일 이외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녀석이라고 알아왔었는데-난. "
" 뭐, 그렇게 찡그릴 것 없어. 강류.
넌 이해를 못하겠지만, 나한텐 꽤나 흥미로운 자료들이니깐. "
" 잠깐, 너 말야..... "
" 내가, "
흥미-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머리를 꺼내자, 홍해아 녀석은 말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녀석의 주홍빛 눈동자는 싸늘히 식어있다. 아아- 어젯밤과, 어젯밤과 같은 눈빛이다.
은연중에 녀석이 이제까지와 똑같길 바란 건 내 욕심이라는 건가.
" 내가..너 때문에 오공 그 자식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강류.
난 그 자식, 마음에 안 드니깐. 눈에 거슬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구. "
" 너.... "
" 그래도... 네가 맘에 들어하는 녀석이니깐 내가 이 정도에서 참는 거야.
다른 녀석이 이런 식으로 우리 사이에 끼어 들었다면, 아마- 죽여 버렸을지도 몰라. "
" .................... "
" 종이 치겠군. 음악이라면- 노처녀 선생 아냐??
그 선생, 자기 수업시간에 늦으면 히스테리 부린다구. 빨리 들어가 보는 게 좋을거야- "
" 네 녀석, 설마.. "
" 그럼 이만, 실례. 7시에 전화할께. "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재빠르게 복도 저 편으로 사라져 버리는 홍해아 녀석 덕분에 녀석을 붙잡으려던
내 손은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버렸다.
점차 멀어져 가는 녀석의 등 뒤를 아무 생각도 못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내 귀사이로-
수업시간을 알려오는 종소리가 시끄럽게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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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엣, 돗대였나. "
물고 있던 담배꽁초를 발로 짓이기던 강류는 마이 속 담뱃갑을 더듬어 보고서야
돗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혀를 차며 손에 들려있는 말로보 담뱃갑을 꾸깃거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편의점 하나.
주저없이 편의점으로 향하던 강류는 왠지 낮이 익은 편의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오공과 처음 만난 곳임을 기억해내고는
실소를 흘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하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들어서서 카운터 쪽으로 향하자, 낮익은 얼굴이 날 반겼다.
" 아, 안녕하세요. 강류. "
" .......팔계?? "
전에는, 분명 여자 종업원이었는데,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채 생긋- 웃으며 반겨주는 팔계에
조금 어리벙벙해진 강류는 금발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쓰게 웃었다.
" 여긴 어떻게? "
" 아르바이트예요. 집에서 오공이랑 먹고 살 만한 돈은 충분히 보내주지만,
제가 쓸 용돈을 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거든요-도대체 얼마나 쓰는거요;- "
" 흐음... "
그제서야 어제 술자리에서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소개했던 게 떠오른 강류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조금 끄떡이며 편의점에 들린 용건을 짧막히 내뱉었다.
" 말보로 소프트 하나. "
" 강류, 미성년자 잖아요?? "
" ..............그런 미성년자한테 술 마시러 가자고 꼬신 건 너였어.. "
" 뭐, 하는 수 없죠. 제가 사는 걸로 할께요. "
" 그러던지. "
" 아참, 오공은요? "
" ......체육시간에 축구하다가 유리창을 깨먹어서, 아마 혼나고 있을거야.
난, 그런 것까지 기다려 줄 만큼 의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나왔지만. "
" 아아, 오공. 또 힘을 과다하게 쓴 모양이군요. 휴우, 그렇게도 말했건만. "
" 저기..말야, 팔계. "
" 네? "
" 아니,아무것도 아냐;; "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될지- 다짜고짜 오공이 사고쳐서 전학오게 된 거냐고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류는 보랏빛 눈을 찡그리며 팔계에게 고개를 까딱 숙이며-물론 팔계는 웃음으로 대답했다-편의점 밖을 나왔다.
-PPPPPP~
그 때였다.
주머니속의 휴대폰이 울려댄 것은.
액정화면에 뜬 사람의 이름에 얼굴을 굳히며 강류는 액정을 열었다.
" 나다. "
- 여전히 전화는 딱딱하게 받는군 그래. 따뜻한 목소리로 반겨주면 어디가 덧나냐?
" 시끄러워...홍해아. 용건은 짧게. "
- ㅋㅋ..7시까지 학교 뒷 공터로 나와라. 기다리고 있을테니깐.
오공녀석도 데리고 나오고...............그럼 이만.
끊어져 버린 휴대폰을 마이주머니에 집어넣은 강류는 입꼬리를 틀어올리며
말보로 갑을 뜯어 담배하나를 들어물었다.
날 바보라고 착각했다간 오산이야. 홍해아.
오공을 데려갔다간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는 게 네 녀석 아냐?
오공은 오늘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거다. 나 혼자 갈테니깐.
시계는 정각 6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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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니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3-08-20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