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접어드려는 여름의 끝은 벌써부터 회색을 띄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이치로의 아파트만이 해당되는 것 같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나 상관없이 언제나 회색의 느낌이 드는 아파트. 퇴색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아니, '퇴색하다'와는 어쩐지 다름 느낌이 든다. 무취, 무색. 너무 흔해 빠져서...?
히사야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나를 뒤따라 왔다.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해'라는 조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여전히 나를 따라 나선 이 갈색 우유병. 달라붙는 남색 반 팔과 블루 진. 타이트한 느낌의 패션이다. 아니, 원래 몸이 조그맣기 때문에 그런 느낌은 전에도 들었었지만, 조금 더 부각돼 보인다고 해야 할까. 검은 머리카락이 얕은 바람에 날려 어지러워 보인다.
피부로 자꾸자꾸 달라 붙어오는 머리카락. 후덥지근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러면서도 조금 졸리고 머리가 아파 온다. 당장 바라는 것은 차가운 바람의 기운. 하지만, 아직은 무더위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온도와 습도를 자랑하는 여름에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아파트 내부로 들어섰다. 조금 서늘한 느낌의 홀(홀이라고 볼 것도 없고, 엘리베이터까지 이어진 조금 넓은 통로일 뿐이다)은 베이지 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약간씩 흰색이 드러나 보인다. 한 귀퉁이에는 누구 것일지는 모르지만(분명 아이들의 소유일 것이다), 조금 예쁜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도 역시 거의 벗겨져 나가, 올라가는 버튼과 내려가는 버튼은 별반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두 번 와본 곳이 아니었기에 검지로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손에 익은 동작. 히사야는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조금 긴 복도를 걸어서, 막다른 곳까지 걸어갔다. 복도의 끝에 위치한 곳. 벨을 눌렀다. 자주 들을 수 있는, 「엘리제를 위하여」. 그리고 이츠와리 레이카, 그러니까 신이치로의 어머니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 누구세요 ㅡ "
예상했던 신이치로의 목소리가 아니라서 조금 의외였다. 조심성 없게 언제나 인터폰도 확인하지 않고 문부터 여는 녀석이었는데. 강도라도 찾아오면 어쩔 거냐, 라고 물었을 때 신이치로는 아마 "이렇게 예쁜 강도가 오지는 않겠죠"라고 대답했었다. 하긴, 헤어졌으니 나올 리가 없겠지만.
" 저, 말씀드린 타카하시 미즈코입니다 "
" 아... 타카하시 군이로군요 "
레이카 씨는 머뭇거리듯이 멈칫거리다가 문을 열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자, 예전의 퀴퀴한 냄새 대신 옅은 커피 향이 인식되었다. 고동색 머리카락을 가진 레이카 씨에게서 나는 향일까.
" 서 있지 말고 그냥 들어오세요 "
" 저, 그러니까.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
" 글쎄요ㅡ 부르고 싶을 대로 불러요. 아, 그래요. 그냥 이츠와리라고 불러줘요 "
" ... 아니, 그건 좀 "
" 아. 신이치로와 헷갈릴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그냥 레이카라고 불러요 "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오랫동안 신지 않았던 하이힐을 벗자, 발이 편안함을 느낀다.
히사야는 신발을 벗지 않았다.
" ... 뭐해? 안 들어가려고? "
히사야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는데.
" 왜 그래? "
" 미즈코하고 아줌마하고 비밀 이야기 할 테니까 "
" ... 비밀 이야기? "
" 그냥. 그럴 것 같은 분위기라서 "
풋하고 웃어버렸다. 그냥 그럴 것 같은 분위기라니. 히사야는 여전히 갑작스레 말을 뱉고, 갑작스레 행동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히사야와 신이치로는 닮은 구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히사야가 한 달 전에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별 반발 없이 그녀를 나의 집에서 살도록 받아들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 그런 얘기하지 않아. 비밀 같은 건 없으니까 "
" 조금, 곤란한 얘기일 것 같은데. 내가 들어도 되는 거야? "
" ㅡ ... 글쎄. 하지만, 곤란한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히사야가 변한다거나 하지는 않잖아? "
히사야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어 주섬주섬 한 구석에 몰아 넣었다. 더불어 나의 검은 색 하이힐도 자신의 운동화(전에도 언급한 적 있듯이, 이 운동화 역시 내 운동화다) 옆에 가져다 놓았다.
히사야와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히사야는 소파에 놓여져 있던 빨간색 쿠션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해서 만지작거리고 있다.
" 기다려요. 곧 뭐라도 가져올 테니까 "
' 아니, 괜찮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이카 씨는 이미 부엌으로 가버렸다. 사실 부엌이라고 말하기가 뭐한 것은, 현관과 트여져 때문일 것이다.
" 레이카 씨 "
" 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요, 타카하시 군 "
레이카 씨는 특이하게 나를 타카하시 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소학교 시절에 선생님이 남녀 상관없이 '이츠키 군''유키 군'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타카하시 군'이라고 나를 지칭하고 있었다.
조금 익숙한 느낌.
" ... 신이치로는 지금 집에 없나요? "
" 신은... 아, 기다려요. 이것들, 곧 다 준비해서 내어갈 테니까. "
마치 뜸들이듯이 좀처럼 얘기하지 않는다. 히사야가 말한 것처럼 신이치로에 대한 것은 비밀 이야기인 양. 레이카 씨가 내어온 것은 레몬 파이와 녹차였다. 조금 언밸런스한 감이 든다. 우유를 좋아하는 히사야는 녹차는 그리 반기지 않았지만, 레몬 파이에 대해서는 환영인 모양이었다.
레이카 씨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 그래요... 타카하시 군은 일단 신에 대한 용무로 이 집에 찾아온 듯 하니까요... "
반은 맞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카 씨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집에 찾아온 것을, 신에 대해서 물은 것을 후회했다.
" ... 신은, 한 달 전에 죽었습니다 ... "
간만의 우유병입니다 (하하)
뭐, 이번 편의 스토리를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 여차저차해서 신이치로가 죽었고, 그 사실을 미즈코가 알았다 "
이겁니다만.
쓸데없이 길어졌군요 (웃음)
순수문학에서 미스테리 소설로의 한 걸음 (아하하)
갈색 우유병, 정말 반가워요~ >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