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의 십자가-Frozen Cross 제1장.알고 있던 것, 모르고 있던 것, 알아야 하는 것 1-3
  • 조회 수: 1491, 2008-02-06 04:16:58(2007-09-25)
  • 4월 셋째 주 월요일. 가르데일라 입학 시험일이다. 새벽부터 잠이 안 와 일찍 아침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다. 뱃속에 큰 뱀이라도 한 마리 들어앉은 듯이 갑갑했다.
    아침을 보니 도저히 못 먹겠다. 너무 긴장을 하면 식욕도 없어지는 모양이지. 우유나 한 잔 마시려고 했지만 악착같은 어머니의 권유로 긴 소시지와 식빵을 하나씩 먹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잘 하고 오너라.”

    어머니는 나가려는 나를 잡고 한 번 안아 주셨다. 이렇게 안겨보는 것도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목검 한 자루와 아버지가 만드신 롱 소드 한 자루를 허리에 매었다. 아주 수수하게 만들어졌지만 강도와 예리함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륙 최고 품질이다. 왜냐, 우리 아버지 솜씨기 때문이지.

    날씨는 그닥 좋지 않았다. 마차역까지 이어진 길 위는 모두 간밤에 내린 비로 질척했고, 잔디 위에는 아침 안개가 깔려 있었다. 하늘은 다시 비를 퍼부을 모양인지 매지구름이 가득했다.
    마차역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스덴보름 일대는 가르데일라 입장에서 보면 촌구석이라, 특별히 직접 마차를 보내 학생들을 수송해 간다. 그러니 전부 그 마차가 서는 이 역에 모일 밖에. 게다가 북주에서 가장 큰 산맥인 ‘프로즌 라인(Frozen Line)'을 포함하는 스덴보름은 작은 도시가 아니라서 학생들 숫자도 수십 명에 육박했다. 아, 작은 숫자라고 생각하지 말길. 가르데일라의 한 학년 정원은 150명이다.

    그런데 이것 참, 스덴보름에 이렇게 부자가 많았나.

    “도련님, 검이 도착했습니다.”
    “음, 좋아. 레이몬드, 이제 가도 좋아요.”
    “부디 합격하시길 빌겠습니다.”
    왜, 어째서, 내 또래 아이들한테 하인이 붙어 있는 거냐구. 게다가 검은 더 가관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기 주먹만한 보석이 가드 중앙에 떡하니 박혀 있다. 이거, 아직 시험도 안 쳤는데 기가 팍 죽는다.
    “번호를 부를 테니 줄을 서 주십시오!”
    마차 앞부분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마 가르데일라의 4학년생 정도 되겠지.
    첫 마차 뒤로 학생들이 반쯤 정렬되자, 나도 마차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차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새하얀 바탕에 창문을 따라 이어진 고풍스러운 금색 장식, 금색 바퀴살은 낡은 역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나를 포함하여 나머지 학생들까지 정렬이 되자 마차를 끌 말도 보였다. 불타는 듯한 주황색 갈기에 마차와 같은 흰색 털-거의 은빛이라고 해도 될 만큼 윤기가 흘렀다-을 가진 우아한 말이 네 마리 마차에 묶여 있었다. 강철같은 다리와 발굽이 때때로 땅을 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까지 갖게 했다.
    마차는 스덴보름 입구의 절벽을 지나 거대하게 펼쳐진 붉은마루 산맥 근처를 달렸다. 창 밖의 날씨는 여전히 흐림. 철이 많이 섞여 붉은 빛을 띠는 산맥과 합쳐져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옆을 지나는 화려한 마차는 거의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옆자리에 앉은 녀석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다. 나는 긴장 때문에 몸이 덜덜 떨리고 있는데, 아주 강철 심장이로구만.
    마차 안은 조용했다. 묘한 적대감이 감돌았고, 누구 하나 함부로 손발을 놀리지 않았다. 이 분위기 속에서 조금만 더 있다가는 미쳐버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마차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차가 멈추자 마부석에서 그 4학년생(물론 추측이지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쉬었다 갑니다!”

    마차 탄 지 30분도 안 됐는데 쉬어 간다구? 난데없는 소리긴 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마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으으읏...숨막혀.”

    기지개를 켜며 숨을 들이쉬니 선득선득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트렸다. 붉은 빛의 산맥은 좋은 경치도 선사했다.
    하지만 기상은 점점 악화된 모습이었다. 그나마 희끄무레하던 하늘은 이젠 뇌우가 쏟아져도 시원찮을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나는 바위에 앉아 마차와 말들을 구경했다. 커다란 말들은 4학년생들이 가져온 물을 달게 핥고 있었다.

    느닷없이 쉬어 간다고 한 이유는 저거였군. 덩치가 큰 만큼 유지비도 많이 드는 모양이지?

    한참 물을 먹는 걸 보다가 칼이나 손질해 볼 요량으로 다시 마차로 향했다. 몇 명의 학생들과 마주쳤지만 역시 적대적인 눈빛만이 교환될 뿐이었다. 나는 모퉁이를 돌아 마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끼기긱.

    문득 귀에 거슬리는 금속성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보자, 마차 오른쪽 앞바퀴에 누가 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앞바퀴를 잡고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몸집의 남자였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으히익!”

    아니, 왜 이렇게 놀라지.

    땅딸막한 사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잠시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옆에 널려 있던 공구를 황급히 챙기고는 다른 마차로 쏙 들어갔다. 별 희한한 사람 다 보겠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붉은마루 산맥에서 가장 길이 험하다는 ‘징계의 계곡’에 올랐다. 여기만 넘으면 알하자드의 대평원이 펼쳐지고, 그러면 곧 가르데일라도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계곡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차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단 10미터도 전진하지 못하고 마차 바퀴가 구덩이에 빠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말이 워낙에 힘이 좋아서 몇 번 고삐를 당기자 바퀴는 금방 쑥 빠져나왔다. 하지만 바퀴를 살펴본 4학년생이 지은 표정으로 봐서는 바퀴살이라도 몇 부서진 것이 분명했다.
    마차는 힘겹게 전진해 나갔다. 계곡 중간의 길은 오른쪽이 전부 낭떠러지였다. 붉은 색의 깎아지른 절벽이 마차를 삼킬 듯이 이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끼기긱.

    낭떠러지 길을 반쯤 지났을 무렵, 귀에 익은 마찰음이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어디서 나나 보려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끼기긱.

    어... 아무래도 앞바퀴 쪽인 듯하다. 축과 바퀴가 서로 긁히며 나는 소린가?

    끼이이익.

    세 번째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왜 앞바퀴와 마차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지?

    끼이이이이-

    나는 머리를 창밖으로 내민 채로 벌떡 일어서 버렸다.
    “컥!”
    이런... 창틀에 부딪힌 머리가 여간 아프지 않았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이봐요! 마차 오른쪽 앞바퀴가 빠지고 있어요!”
    나는 마차 앞쪽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요?”
    에이잇, 마부는 대체 뭘 보는 거야!
    “마차 좀 세우라구요오오!!!”

    끼이익, 덜커덩, 쾅!

    말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며 지면과 충돌했다. 젠장, 바퀴 녀석 정말 빨리도 빠지는군.

    “비, 빌어... 먹을!”

    마부석의 4학년생이 필사적으로 고삐를 당기며 외쳤다. 바퀴가 빠진 오른쪽 축이 땅에 깊이 박히자 마차는 그것을 중심으로 회전력을 받아 빙글 돌았다. 설명이 조금 복잡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끄아아아아아악!”

    어흠, 흠. 비명소리가 멋들어지는군.
    마차는 길에서 벗어나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천장에 유리창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차는 전복되어 버린 것 같았다.
    “으윽!”
    몸을 일이키고 보니 등이고 허리고 성한 데가 없었다. 뭐, 살아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났군, 키이스 에반스.”
    무뚝뚝하고 가는 목소리, 나는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에밀리오...”
    “참, 이렇게도 시험에 떨어지게 되는군.”
    “헛소리 하지 마. 지금이라도 말을 타고 가면 돼!”

    나는 벌떡 일어나 마차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붉은 땅 위에 얼룩이 조금씩 그려졌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20명도 넘게 타고 있던 마차였는데 왜 아무도 없지?
    “다른 학생들은 전부 떠낫다. 말을 탔는지 집에 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떠나 버렸어.”
    에밀리오가 마차에서 나오며 말했다. 또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여기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 어디야?”
    “왼쪽에 보이는 산을 넘어가면 험버튼이라는 마을이 있지.”
    “좋아.”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온 몸을 적셨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학교 문턱도 못 넘어보고 탈락이라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구.

    생각보다 마을에는 빨리 도착했다. 나는 약간 언덕에 위치한 역으로 곧장 뛰어갔다.

    “아니, 이 빗속에 말을 타려구?”
    “좀 급해서... 돈은 더 드릴 수 있습니다. 말을 내 주세요.”
    “목적지는?”
    “알하자드 평원, 가르데일라.”
    “혹시 시험 치러 가는 겐가?”

    나는 말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였다. 너무 뛴 탓에 속에서 신물이 올라와서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늙수그레한 역 주인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골 말을 끌고 왔다.

    “미끄러우니 조심하게.”
    “고맙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 곧바로 말을 몰았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는지 감이 안 와서 더 불안했다.

    목에 걸려 있던 곰인형이 문득 만져졌다. 뮤리엘 선생님을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것으로 첫 장이 끝났네요. 이제부터는 1인칭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옮겨 갑니다. 스토리 꽤나 방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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