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의 십자가-Frozen Cross 제1장. 알고 있던 것, 모르고 있던 것, 알아야 하는 것 1-2
  • 조회 수: 1386, 2008-02-06 04:16:58(2007-09-25)
  • 모든 일의 시작


    “키이스, 그만 일어나렴. 학교 가야지.”

    어머니의 목소리다. 비몽사몽간이긴 하지만 저 고운 목소리는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뭐, 저런 대사를 읊을 사람도 어머니 뿐이지만.
    눈을 뜬 상태로 달콤한 이불 속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더니, 문득 눈 옆으로 한 줄기 물방울이 떨어졌다. 하품 때문에 그런가 했는데, 눈도 좀 부은 듯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거울에 얼굴을 비추었다.

    “아니...?”

    밤새 운 사람처럼 눈이 퉁퉁 부어 있다. 에... 그러고 보니 어제 꿈이 좀 이상했던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러고 있다간 지각해서 호랑이 같은, 아니지, 정말로 호랑이로 변신하는 변신술 선생님한테 혼나게 되니까 빨리 아침을 먹어야 된다.

    대충 세수하고 식탁에 앉으니 달걀과 식빵이 구워져 있다. 아침이라 입맛이 없다. 윽.
    “그것 다 안 먹으면 점심 때까지 못 견딘다.”
    아침을 남기려고 하자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잠시 식빵을 내려다보다가 한 입에 꾸역꾸역 쑤셔넣어 버렸다.
    “좋아... 이러면 되는 거죠?”
    힘겹게 빵을 꿀꺽 삼키고 말하자 어머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셨다. 자, 그럼 학교로 출발해야지.
    “다녀올게요, 어머니.”
    수염이 무성한 대장장이의 사진 앞에서 한 번 더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문을 열자 눈부시게 햇빛이 비쳤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냥 강가에 누워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은 날씨였다. 이런 날에도 학교에 처박혀 있어야 되나...
    “키이스~!”
    오오, 누군가 이몸을 애타게 부르는군. 여자 목소리였다. 나랑 알고 지내는 여학생은, 음, 솔직히 몇 명 없다. 거기다 이 길에서 나를 저렇게 부를 만한 여학생은 딱 한 명밖에 없다.
    긴 금발을 휘날리며 뛰어 오는 사람은-역시 그렇군. 우리 반 반장 에일린이다. 숨이 차서 헐떡이는 걸 보니 뭔가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렇지, 나 정도는 되어야 중요한 일도 처리하고 그러는 거다. 그런데,
    “너 또 도시락 잊어버렸지?”

    이건 또 뭔 소리야.

    “너희 집 앞으로 지나가는데 아주머니가 주시더라.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챙겨줘야 되니?”
    에일린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도시락 꾸러미를 내밀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아, 고마워.”
    건네받고 나니 왠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에잇, 여학생과 단 둘인데 도시락 주머니나 오고 가는 상황이라니.
    어쨌든 우리 둘은 같이 언덕을 내려갔다. 이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다리 건너편에 학교가 서 있다.

    “너, 이 다음 어느 학교로 갈 건지 정했어?”
    에일린이 문득 조용히 물었다. 이상하게도 주위가 너무 고요한 느낌이었다.
    “그거야...”
    난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연노랑빛 머리카락과 하얀 블라우스, 하늘색 치마가 나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거기다 습기 찬 안구...... 아니, 내가 미쳤나 보다. 이런 건 ‘촉촉한 눈망울’이라고 하는 거지.
    에일린은 힘없이 미소지었다.
    “넌 똑똑해서 신경도 안 쓰이나 보구나.”
    “아, 아니야. 요새 내가 얼마나 연습하는데.”
    당황한 내 말투를 듣고 에일린은 깔깔 웃었다.
    “아, 아. 농담이야. 네가 연습하는 모습, 몇 번 본 적이 있거든.”

    아하, 그래서 그랬군. 어쩐지 가끔 누가 보고 있는 것 같다 했지.

    “그럼 내가 연습하는 장소도 알고 있겠네?”
    “그래. 라임 산 중턱에서 좀 들어간 곳. 나도 가끔 올라가곤 하니까. 혹시 비밀 장소라도 되는 거였나?”

    좀 가소롭다는듯이 말한다. 내 딴엔 정말 찾기 어려운 곳으로 골랐는데.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학교에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뭐, 변신술 담당 쥘 선생님도 크게 야단치시지는 않았다. 이제 며칠만 더 나오면 졸업식이기 때문에 학교는 거의 축제 분위기다.
    “키이스 에반스.”
    헛, 이렇게 살짝 다가와서 말을 거는 녀석은 에밀리오 뿐이지.
    “뭐냐, 지렁이.”
    혹자는 토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녀석이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으흠, 좋은 정보를 가르쳐 주려고 왔는데.”
    “지렁이에게 정보를 얻어야 한다니, 비극이로군.”
    갑자기 교탁 쪽의 엔델리온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을 듣고 웃는 건가? 원래 잘 안 웃는 애라서 기분이 이상하다.
    “아니, 엔델리온은 잘 웃는 애야.”
    나는 잠깐 뭘 잘못 들었나 하고 생각했다.
    “뭐라고?”
    에밀리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잘 맞추지? 아마 내가 다음에 한 말도 맞을걸?”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냥 좀 음침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예언에 소질이 있었던 건가?
    “너, 가르데일라에는 떨어질 거다.”
    또 다시 정신이 멍해졌다. 가르데일라에 시험 치러 간다는 건 담임선생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게다가 떨어진다고?
    “난 열심히 했어. 떨어질 이유는 없다구.”
    좀 정색해서 말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형편이 그리 좋지 않게 되었다. 내가 보통의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면 우리 어머니에게 너무 많은 부하가 걸리게 된다.
    “네 실력이 어쩌고 하는 문제가 아니야. 그것도 조금 작용하긴 하겠지만 시험 외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할 거다.”
    나는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체 저 녀석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시험 외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찜찜한 기분을 잔뜩 가지고 교무실로 향했다. 아 왜 가냐고? 가르데일라 같은 거물 학교에 시험을 치려면 선생님이 써야 되는 서류가 많다. 그것 때문에 가는 거다.
    교무실 문을 여니 다른 선생님들도 대부분 진학 서류를 쓰고 있었다. 숨막히는 분위기다. 우리 담임선생님, 뮤리엘 선생님은 교무실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구석에 있는데, 윽.
    “음, 일단 여기 앉아 봐.”
    뮤리엘 선생님은 스물 중반의 아가씨다. 담당은 레이피어(Rapier) 검술. 호리호리한 몸매에 알맞은 과목이다. 책상 옆에는 좁고 긴 칼이 화려한 칼집에 꽂혀 있었다. 뭐, 아무리 화려해도 나는 그 쪽에 취미가 없지만 말이다.
    “서류는 다 써 놨어. 추천서는...”
    선생님은 질이 좋아 보이는 종이를 한 장 끄집어냈다.
    “한 번 읽어 봐.”
    나는 말없이 종이를 받아들었다. 검술 성적을 비롯한 모든 성적이 높음. 상황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함. 그리고, 푸훗, 힘이 굉장히 세다...라...
    “더 추가할 말 있니?”
    “아, 아뇨. 충분해요.”
    또 무슨 희한한 말을 적을까봐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럼...”
    선생님은 종이를 다시 책상 밑으로 넣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잠시 같이 걸을까?”

    어... 별로 거절할 구실은 없는데...

    “수업은 어떻게 하시구요?”
    “괜찮아. 이번 시간은 전부 진학상담이거든.”

    이리하여 난 예상치 못한 산책길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선생님과 산책이라니, 오늘 좀 이상한 날이다.
    선생님은 야트막한 잔디밭을 지나 장미 덤불이 우거진 공원을 통과하는 산책로를 택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첫 데이트, 아니, 내가 미쳤나 보다. 이성과의 첫 ‘산책’인 것 같다.

    “아, 날씨 참 좋다~ 안 그래?”
    선생님은 시종일관 활짝 웃으면서 걸었다.
    장미 가시에 찔려도,
    “아얏, 히히히...”
    개똥을 밟아도,
    “푸훗, 이거 세척 마법을 써야겠네. 히히.”

    ...도대체가 나는 왜 따라오라고 한 거야.

    “벤치에 좀 앉자.”

    선생님은 장미 공원이 나오고서야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좀 쓸만한 말을 하시려나.
    “키이스, 넌 가장 강한 검술이란 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니?”
    에... 이건 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버린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이때까지 해 온 검술은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아주 거친 검술입니다. 그 물음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답밖에는 모르겠네요.”
    내 말을 듣고 선생님은 정말 예쁘게 웃으셨다. 검고 긴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자 장미꽃마저 무색할 정도였다.
    “역시 너다운 대답이야.”
    흠, 선생님도 선생님답게 예쁜데요, 뭘.

    선생님은 금방 웃음기를 지우고 말을 이었다.
    “너의 검술은 말하자면 거친 바다의 검이지. 그래서 파도란 뜻의 서지(Surge)라고 부르지 않니. 하지만 너의 그런 검에서도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부드러움이야.”

    부드러움이라, 뭔가 알기 어려운 말이야.

    “서지랑 부드러움은 정말 상극인데요. 선생님의 검과는 어울릴 지도 모르겠군요.”
    “아직까진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해.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너도 부드러운 검이 어떤 건지 알게 될 거고,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함으로써 그 시기가 좀 앞당겨지지 않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히 그럴 지도 모르죠.”
    “나는 말이야...”
    선생님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너처럼 뛰어난 학생이 고통 받길 바라지 않는단다. 타인보다 훨씬 높은 목표를 세우고, 도달하지 못하면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하지만 아무리 실패를 해도 너는 너야. 똑같이 뛰어난 학생이지.”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으셨다. 저렇게 잘 읊어내는 걸 보면 선생님이 딱 그렇게 살아오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 내, 키이스.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생긋 웃으셨다. 난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날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리본이 묶인 조그만 상자를 발견했다. 포장을 열어 보니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곰인형이 싱긋 웃고 있었다.

    정말 커다란 응원인데요, 뮤리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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