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無題
  • 惟痕 [유흔]
    조회 수: 1403, 2008-02-06 04:16:47(2006-10-28)




  •  무미건조했고 , 진부했다 . 드라마나 소설에 흔하디 흔하게 나오는 이별의 장면은 , 진눈깨비가 으슬으슬 내리는 바깥 풍경과 그닥 고급스럽지도 않은 , 그냥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까페와 ,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인 커피향기에 겹쳐졌다 .

     "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 "

     사실 예상은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 애정도 증오도 담기지 않은 무관심한 눈빛과 , 뜸해진 연락 , 심지어 다른 여자를 만단다는 소문까지 들었다면 , 아무리 바보같고 눈치가 없는 여자라도 그네들의 진지하지도 , 그렇다고 장난스럽지도 않았을 사랑놀이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 그리고 난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 그렇게 천천히 오늘을 준비 아니 , 그저 오늘에 익숙해 지기 위해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을 흘려보냈을 뿐이다 .

     그는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유리 너머의 겨울에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 심지어 내가 이 카페에 들어와 그의 자리 앞에 앉았을 때에도 , 그는 이제 왔냐는 말 한 마디도 , 심지어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다 . 억울하다던가 , 슬프다던가 , 피해망상에 젖은 여자들이 울면서 질질 끄집어내는 그런 감정들은 생기지 않았다 . 그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 저번에 사놓은 초콜릿을 먹으면서 저번에 사놓은 책을 읽고 싶었다 . 생각해보면 그 일련의 행동들도 다 오늘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닌가 - 하는 터무니없지만 설득력 있는 생각에 , 나도 모르게 입술 끝을 살짝 비틀었다 . 그제서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내가 꽤나 좋아했었던 붉은 입술은 웃음도 , 그렇다고 떨리는 목소리도 담고 있지 않았다 . 언젠가 식어버린 ,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식어 있었을지도 모를 , 싸늘한 감정의 잔재들만이 남아있었을 뿐이다 .

     " 너도 나도 , 질렸잖아 . "

     질렸다 , 라 . 그게 당사자의 입에서 나올 말 치고는 솔직한 것 같아서 , 눈을 들어올려 그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 그는 변명하듯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부드러웠지만 , 거기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 그 목소리를 듣고 난 문득 깨달았다 . 내가 그에게서 그 무엇을 바란다고 한들 , 나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 그것이 사랑이든 , 증오든 , 심지어 무관심이든 , 적어도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는 위치 . 나는 지금 그 곳에 서있었다 .

     " 이미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 내가 다른 여자 만난다는 것도 . "

     그의 말들은 이상하게 들렸다 . 마치 난 헤어지기 싫은데 , 이유가 이러이러하니 나도 어쩔 수 없다고 .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하지만 난 이런 어이없고 유치한 말에도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 어떻게 하면 빨리 이 지겨운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집에 가는 길에 따뜻한 붕어빵을 사갈까 , 골목 어딘가 쯤에 붕어빵 장수 아저씨가 한 분 계시는 것 같던데 . 난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그에게 이 개자식 ! 하고 울면서 외친 뒤 뺨을 때리거나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쏟아붓는 행위도 할 수 없었다 . 이미 그러기엔 나는 너무 무디어져 있었고 , 그런 행위를 해봤자 피곤해지는 건 내 몸과 마음뿐이란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물론 그는 , 바깥을 돌아다니는 데에 약간의 문제가 생기겠지만 , 난 그런 소소한 복수로 감정의 무게가 덜어지길 바라는 유치한 10대의 소녀가 아니었다 .

     " 간단하게 용건만 말하고 끝내지 ? "

     이 말은 어쩌면 그에게 약간 비웃음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 순간 그의 눈썹이 약간 일그러지는 것을 나는 보았고 , 그것은 그가 기분이 나빠졌을 때에 주로 하는 행동이었으므로 . 나는 마치 관조자처럼 그의 감정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 정작 당사자인 내가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는 건 , 참 아이러니하다 . 그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보자니 여태껏 잠시동안이라도 그에게 빠져 있었던 내가 한심해져버린다 .

     " 할 말 없으면 , 먼저 일어날게 . 이미 끝난 일 가지고 감정소비하는 건 둘 다에게 피곤한 일 아니겠어 ? "

     난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 그는 당황한 듯 , 그저 나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 하긴 ,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항상 그에게 못 살고 죽는 나였기에 , 그는 적어도 울면서 내가 매달릴 거라고 생각했었나보다 . 안일한 생각이다 .

     " 여기 계산 해주세요 . "

     친절한 웃음을 띤 종업원이 다가와 계산서를 보더니 , 내가 낸 돈의 액수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 약간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공손한 자세로 입을 연다 .

     " 손님 , 이 커피의 가격은 이미 지불이 되었습니다 . 저 쪽에 앉아 계신 남자분께서 , 그 커피를 시키실 거라고 하시며 손님께서 오시기 전에 ... "

     말 끝을 흐리며 난감한 듯 웃는 그녀를 보고 나도 웃어주었다 . 이것이 그의 마지막 배려이든 , 아니면 치졸한 수작이든 상관없었다 . 계산대 위에 올려진 돈을 다시 받으며 , 난 이 돈으로 붕어빵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으슬으슬한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 기분은 좋지도 , 나쁘지도 않았다 . 질질 끌고 있던 일을 끝내버린 건 분명히 후련하고 , 그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조금 통쾌하기까지 했었지만 , 지금 내가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없는 이유는 , 이것도 또 하나의 진부한 드라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





댓글 5

  • しずく

    2006.10.28 15:18

    붕어빵 먹고 싶은건 엄마잖아 ㄱ-?
  • 惟痕 [유흔]

    2006.10.28 17:55

    아 , 들켜버렸다 ..
  • しずく

    2006.10.28 17:58

    엄마 바보 ㄱ-
  • [레벨:5]id: 이엔

    2006.10.28 18:47

    맛있겠다-_-+..............<
    난 저런 성격이 맘에 들어요<
  • Profile

    [레벨:7]id: 라퀼

    2006.10.28 21:15

    헤- 저도 저런 성격이 좋더군요- (싱긋)
    질질 끄는일따위- 단순한 시간낭비라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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