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2.14 )
내 눈이 나빠진건지, 하늘이 뿌옇게 흐려진건지 알 수 없었다.
" 삼장... 삼장, 집에 있는거야? 억, 담배연기- 그만 좀 피우라니까. "
오공의 목소리가 들리자 습관적으로 약 봉지를 뜯어 입에 털어 넣었다.
물을 다 마셔갈 때쯤 오공이 보였다.
" .... 왔어. "
" 응, 밥 먹고 약 먹는거야? 빈 속에 먹으면... "
" 상관하지마. "
" 삼장... "
머리가 또 울려왔다.
억지로 삼킨 것들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 점심 만들어놓고 갈까? 아니면... "
" 이제 오지마. "
오공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벌써 눈물이 나왔다.
"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구!!!! "
던진 컵이 창문에 맞아 쨍그랑- 거리며 깨졌다.
마치 내 모습 같았다. 사랑에 허우적거리며 깨져가는 지금 내 모습.
" 알아.... 삼장이 무슨 말 하는지 알아. "
아니야,
이게 아니야. - 사랑해, 가지마. 너마저 가 버리면 나 죽을지도 몰라.
"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아. "
웃기지마. - 너도 죽어버리면 좋을텐데.
" 삼장이 팔계랑 가장 친했던 친구란 것도, 내가 팔계 애인이었고, 삼장하고 하룻밤 잔 것도 다 기억하고 있어. "
" 하하... 그랬었나? 그런 시절도 있었나? 팔계가 누구지? "
아팠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조금이라도 기운내지 않으면 곧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지쳤다.
쉬고싶어, 모든 기억을 다 지워버렸으면 좋겠어.
- 왜 죽어버리지 않는거야?
" 팔계가....................... 나 때문에 자살했다는 것도 알아. "
팔계가 죽은 후 가끔 그의 환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럴때마다 그는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망하는 눈빛.
그리고 언젠가부터 오공의 얼굴 위로 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미쳐버린건가?
" 삼장이 힘들어하는 거 알아. 약도 먹는거 알아, 약을 먹지 못하면 잠 못자는 것도 알아. "
니가 죽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벌써 이상한 생각이지?
아니, 사랑하잖아. 사랑하는데-
왜 죽기를 바라는거야?
차라리 미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라.
" 그치만........ 그치만 오늘은.. "
" 오공.... "
그의 눈물을 보고나서 갑자기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깨진 유리조각을 밟고 오는 그의 발은 피투성이였다.
그의 손이 나에게 다가왔다.
잡고 싶었다. 그에게 내 몸을 맡겨버리면 쉴 수 있을 것 같아.
" 발렌타인 데이잖아....? "
잡을 수 없다.
나는 잡을 수 없어,
- 니 친구가 죽었어.
- 너 때문에 죽은거야.
- 니가 오공이 내민 손을 잡았기 때문에 그가 [자살]한거야.
또 순간 팔계의 얼굴이 보였다.
" 마지막으로........ 이걸 주고 싶었어. 초콜렛, 받고싶어 했잖아? "
" 마지막? "
" 내가 있어서- 내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삼장이 미쳐가는거야. 그렇지? "
" 그래, 알고 있었군. "
이상한 웃음이 입에서 나왔다.
달콤한 초콜렛 향기, 그래- 기대했던 선물이었어.
사랑했으니까.
사랑한다구. 전할 수 없었어, 단 한번도.
" 그러니까 떠날거야. 내가 없는 편이 삼장을 도와주는 거니까. "
그의 눈물.
그의 초콜렛.
그의 사랑.
그의 음성.
그의 향기.
그를 향한 나의 사랑.
혼란스러웠다.
" 안녕, 삼장. 이제 그만 편해지길 바랄게. "
" ........ 오공? "
" 내가 없으면 더 이상 팔계의 환영이 보이지도 않겠지? "
" 오공, 오공........... "
보이지 않은 사람인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그가 내 손을 잡을까봐, 내가 그를 붙잡을까봐.
어느 쪽도 원하지 않았다.
내릴 수 없는 결정-
그와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랬지만.
나는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었다.
" 그치만 이건 들어줘. 나 정말- 사랑했어. 삼장을. "
울고 있었다.
안아주고 싶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몸이 일어나지 않았다. 약 기운이 도는걸까, 몸이 나른해졌다.
그의 피가, 그의 눈물이, 그의 절망이 내게 닿아오는데-
사랑해. 나도 말하고 싶었어, 사랑한다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눈이 감겼다.
마지막까지 내게 들렸던 건 그의 울음과 잘그락- 거리며 밟히는 유리조각들. 그리고 초콜렛 내음.
( 2004.2.14 )
" 에에- 벌써 들어가게? "
" 응... 몸이 안좋아. 갈게. "
무언가 마음 속에 가라앉은 기억이 있었다.
기억하려고 하면 할수록 기억나지 않는 상처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억해내지 말라고-
발렌타인데이는 싫었다.
그 날은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팠다.
" 아, 빨리 자고싶다. "
옷장 문을 열다가 저 안 깊숙이 박혀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꺼내보니 보랏빛의 상자. 안에는 초콜렛이 있었는지 초콜렛 향이 묻어 있었다.
" 응? 편지...... 인가? "
- 이걸 보고 있을때는 몇 년이 지난 후겠지?
틀림없이 초콜렛은 쓰레기통에 버린 후에 상자는 옷장에다 던져놓을 테니까 말야.
나 죽지는 않을거야.
죽으면.... 나마저 죽으면 아마 삼장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될지도. (농담이야)
삼장이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살아보자고 힘을 냈어.
아주 조금.
슬퍼져,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 옆에 팔계가 있는 것 같아.
무섭지만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기뻐. 팔계가 다시 살아있는 것 같거든.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가라앉은 상자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기억이 돌아왔다.
눈물이 났다.
아문 상처가 다시 터져버린 느낌,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그저 오공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삼장도 매일 나처럼 팔계를 보는걸까?
나 가끔은 무섭거든. 그 눈을 보고 있으면 나 역시 죽어야 할 것만 같아서.
금방이라도 칼을 들고 내가 내 손목을 그어버릴 것만 같았거든.
그럴때마다 전화하고 싶었지만, 그렇지만 할 수 없었어.
너무 사랑하는데.
이제야 깨달았다.
오공이 더 힘들었다는 것을, 둘이서라면- 어쩌면 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 때엔 왜 몰랐던 것일까.
그를 남겨두고 왔다.
잊어버린 채 나 혼자만 먼 길을 돌아 도망쳐 나왔다.
- 나 꼭꼭 숨어 살거야. 우연히 삼장을 만나면 안되잖아.
삼장이 이걸 읽고 있을 때쯤엔, 오공이 누구지? 라며 편지를 구겨서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만큼 삼장은 이 상처에서 벗어난 것일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도 구원받은... 거겠지?
그래도 발렌타인데이때, 누군가 초콜렛을 줬다는걸-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정성을 담아서 누군가 줬다는걸 삼장이 기억해줬으면 하고 바랄때도 있어.
너무... 큰 욕심인걸까?
사랑해.
사랑해. 아주 많이.
눈물이 흘렀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아픔.
편지를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전하고 싶었지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사랑한다, 라는 그 말.
초콜렛만큼이나, 쓰레기통에 던지지 않고 차분히 먹어갔던 그 초콜렛만큼이나
사랑스러웠던 그 아이.
사랑했었다는 늦은 후회.
아하하;
마감이 오늘이란걸 알고 급하게 써버린 단편이네요;
이상하지만 그래도올려봅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