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廢亂心深 - 4. 나 환상의 그대를 원했지만, 이젠 어른이 되려고 해.




  • “ 사장님, 이 서류 전부 확인하지 않고서는 절대 가실 수 없습니다. ”
    “ 아, 형. 한 번만 보내줘요.
    오늘 현화가 부탁할 게 있다고 오라고 했다고. ”
    “ 부인 탓 하면서 살짝 빠져나갈 생각 하신다면 결코 용서 못 합니다. 유현빈씨. ”














    「 어떠한 방법으로도 결코 내 손에 쥘 수 없다면, 철장에 가둬놓겠어. 내가 잡지 못한다면 다른 누구도 그 보물을 가질 수 없어.
    그렇지만 나 이제 어른이 되려고 해, 환상의 그대를 떠나보내려고 해. 이젠 안녕.  」
















    저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데 왜 거부할 수 없는 걸까.
    이연원, 정말 무서운 사람. ‘감히 사장에게 명령해? 당신 해고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런 인재를 해고했다가는 내가 사장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판이다. 빌 수밖에.


    “ 아 형, 제발 오늘만 보내줘요. 응? ”
    “ 자꾸 그러면 진짜 화낸다? ”
    “ 알았어요. 안 가면 되잖아. 젠장할. 사장이 사장이 아니네.”


    어쩔 수 없지. 못 간다고 말 할 수밖에. 현화 성격에 누구 때문에 못 가게 됬다고 말하면 분명 회사까지 찾아올 게 분명하고…….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일 때문에 못 간다고 문자라도 넣어야지.


    「 나 오늘 일 때문에 못 갈 것 같다. 」
    「 그래요? 할 수 없지. 」


    웬일로 순순히 나오는 걸까.
    평소 같으면 있는 대로 화를 내면서 길길이 뛰어야 하는데.
    왠지 저렇게 나오니 한 번 놀려주고 싶어진다.


    「 웬일로 현화아가씨께서 화를 안 내실까? 」
    「 놀리지 마.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바이올린 배우는 거 허락해 달라는 말 하려고 했던 거야.
    그건 그렇고 현빈씨, 요즘 되게 능글맞아진 거 알아? 뭐, 예전처럼 굳어있는 얼굴보다는 낫지만 말이야. 」


    내가 그랬나. 하긴 예전 사진을 보면 항상 굳어있는 얼굴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일밖에 몰랐었지.
    나 이 아이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한 걸까.


    “ 바이올린? 형 바이올린 켤 줄 알아? ”
    “ 조금 하지. 왜? ”


    서류를 살펴보다 내 말에 대답하는 형. 저 사람이라면 현화가 화내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겠지.


    “ 형, 현화가 바이올린 배우고 싶다는데. 가르쳐 줄 수 있어? ”
    “ 현화라면 너희 부인? 내가 가르쳐 주다 바람나면 어쩔 꺼냐, 쿡. ”
    “ 형이니까 맡기는 거야. 그리고 바람 나 봤자 상관없어. 어차피 좋아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뭐. ”
    “ 어허, 부인 들으면 어쩌려고. 무튼 들어주지. 너 진짜 현화씨한테 아무 감정도 없는 거냐? ”
    “ 당연하지! 설마 내가 10살이나 어린 애한테 마음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 네가 데리고 다니는 그 남자애는. 걔 현화씨랑 나이 비슷하지 않아? ”
    “ 걔랑은 8살밖에 차이 안 나니까 괜찮아. ”
    “ 독특한 놈. 8살이나 10살이나 그게 그거지. ”


    형이 장난스럽게 내뱉은 그 말에 잠시 움찔하였다. 현화를 좋아한다니. 그 애와 결혼한 것도 단지 우리 회사를 위해서였는데 말이야.
    언젠가 그 아이의 부모가 필요 없게 되는 즉시 버릴 생각으로 결혼한 아이인데. 그저 정이 든 걸까.
    솔직히 같은 성격에 비교하자면 더 매력적인 유진이 나은데.


    「 야, 지금 뭐 하냐? 」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던가. 아니 문자 보낸다던가. 유진의 문자다.
    아무래도 여기 계속 있다간 형 잔소리에 뇌가 녹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상을 뛰어 넘어 문가로 뛰어갔다.


    “ 야, 유현빈! 이 자식, 이리 안 와? ”
    “ 싫네요, 형님. 나 애인 만나러 갑니다. 나머지는 형이 다 알아서 해 주세요~ ”


    뒤에서 계속 소리 지르는 형을 뒤로 한 채 유유히 건물을 빠져 나왔다.


    「 나 지금 간다. 집에 꼼짝하지 말고 붙어있어. 」























    양복차림이었지만 상관 쓰지 않고 보도를 달렸다. 밤공기가 시원하게 내 뇌를 쓸고 지나갔다.
    잔소리로 인해 달아올랐던 뇌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듯한 쾌감이 환상적이다. 그대로 달려 그 놈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저 멀리 문 앞에 기대어 있는 그놈. 내가 카드가 없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왠지 저 아이를 보면 그냥 편하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는 듯한 느낌이랄까? 27년 살아오면서 사랑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는지라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아이를 볼 때마다 ‘이 감정이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나, 밤공기에 취한 걸까. 아니면 이 아이의 모습에 진정으로 반한 걸까.
    멀리서 날 보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 아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야, 야! 갑자기 무슨 짓이야! ”


    당황한 듯 소리 지르는 유진. 당황하며 붉어진 얼굴이 귀엽게 느껴져서 더 꼭 끌어안았다.


    “ 야, 너 취했냐? 갑자기 왜이래! ”
    “ 그래, 너한테 취했다. 그니까 이해해라, 응? ”
    “ 예, 예. 이해 할 테니까 사람 많은데서 이러지 말자, 응? ”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진 채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나를 끌고 오피스텔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그놈.
    왠지 오늘따라 정말 취한 건지,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진다.


    “ 진짜, 오늘따라 너 귀여워 죽겠다. 확 잡아먹어 버릴까, 쿡쿡. ”
    “ 너 나 잡아먹으면 베란다 문 밖으로 던져버린다? ”
    “ 네, 네. 주인님께서 진짜 허락할 때 까지는 기다리겠습니다 - ”
    “ 흥.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백만 년이 지나도 허락 못 받을거다. ”
    “ 그럼 백만 일 년 동안 기다리지 뭐. ”


    내 농담에 얼굴을 붉히며 가볍게 발길질을 하는 그 아이.


    “ 음식 재료 사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나 지금 점심도 못 먹고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저녁이나 해 줘. ”
    “ 네, 주인님. 본부 받들어 모시지요- 쿡쿡. ”
    “ ……진짜 장난치면 죽인다? ”


    얼굴이 붉어진 채 문 밖으로 나가는 유진. 저 아이의 매력 중 하나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거랄까.
    모든 감정이 얼굴 으로 전부 드러나니 말이야. 혼자서 어른인 척 해도 어린애는 어쩔 수 없나보다.
    유진이 없는 동안 휴대폰으로 현화에게 장난 섞인 문자를 보냈다.


    「 공주님, 잘 계시는지요? 」
    「 놀릴 거라면 문자 씹는다? 」
    「 어허, 공주님을 위해서 좋은 소식 전해드리려고 문자했는데, 싫으신가 보군요? 」
    「 공주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그건 그렇고, 좋은 소식이라니? 」
    「 바이올린, 너 성격 다 받아줄 선생 찾았어. 」
    「 내 성격이 어때서. 그리고 고마워. 나 정말 배우고 싶었는데. 시간 되면 바이올린 사러 같이 가줬으면 해. 」
    「 본부 받들도록 하죠, 공주님. 나 오늘도 늦을 테니까 먼저 자라. 」
    「 일 없어도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무튼 열심히 해. 」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그 아이, 기뻐보였다. 왠지 내가 더 기쁘다고 느껴진다.
    연원형 말대로 그저 난 어리고 성격 더러운 사람만 좋아하는 변태인걸까.


    “ 후우, 어차피 남자랑 사귀고 10살이나 어린 애랑 결혼했을 때부터 이미 정상은 아니었지? ”

























    이윽고 유진이 돌아왔고, 우리는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살짝 부은 듯한 표정으로 깨작깨작 밥알을 씹는 그 아이가 귀여워서 그 짙은 회색 머리를 손으로 비비적거렸다.
    그럴 때마다 신경질 내는 유진. 신경질은 내지만 그래도 거부하지 않는 모습이 고양이 같았다.
    현화한테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겠지. 그러기에 계속 비비적거리고 싶어져서 싱글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자 갑자기 내 안경을 벗겨 가져가는 유진.
    뭐, 안경정도야 왼쪽 눈을 가리기 위해 쓴 것이기에 없어도 별 상관이 없었다.
    안경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비비적거리니까 유진은 내 머리위에 안경을 놓고 거실로 나가버렸다.


    “ 주인님 진짜 귀엽다? ”
    “ 죽인다니까 계속 그러네? ”


    신경질 내며 시선을 텔레비전 화면에 고정하는 유진. 그 아이가 씻는 동안 나는 저녁을 치웠다.
    다 씻고 커다란 수건을 몸에 칭칭 감은 채 머리의 물기를 털어 달라고 말하는 유진을 다시 한 번 안아주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 주며 침실로 들어갔다.


    “ 따뜻하네. 품속이란 건. ”
    “ 그래? ”


    내 품속에 얌전히 안겨있는 유진.
    그저 ‘잡아먹을 수 없으니 안을 수밖에’ 라는 핑계거리를 내놓으며 이때까지 이 아이가 잘 때마다 안아주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마음에도 없는 사람을 안고 싶지는 않고, 그저 안겨있을 때만 얌전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 유진.


    “ 저기, 있잖아. ”
    “ 응? ”
    “ 너, 예전에 비해서 엄청 능글맞아진 거 알아? 사실 처음 만났을 때 그 모습이 더 좋았는데 말이야. ”
    “ 그럼 지금은 싫다는 거야? ”
    “ 그건 아니지만 말이야. ”


    현화와 똑같은 말을 하는 이 아이. 이 아이와 만났을 때 현화와 막 결혼했을 무렵이었나. 이 아이도 그때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정말 잠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 유진.




























    “ 그리고 나, 현화라는 애 봤어. ”
    “ 아, 그래? ”


    나의 ‘아, 그래?’ 라는 간단한 말에 말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느꼈는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유진.
    그 아이와 계속 이야기 하고 싶었고, 뒷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기에 뒤에 말을 더 덧붙여보았다.


    “ 현화랑 만났다면서. 말을 꺼냈으면 계속 이어야지? ”
    “ 그 애, 예쁘더라. 까만 고양이 같았어. ”
    “ 너도 고양이 같고 예뻐, 임마. ”
    “ ……그래서 나랑 만나는 거야?”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내 눈을 응시하는 유진.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진지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눈빛에 심장이 순간 멈춰버린 것 같았으니까. 그저 머릿속의 뻔한 말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 무슨 말이야. ”
    “ 그 아이랑 나랑 비슷해서 만나는 거냐고. ”
    “ 그럴 리가 없잖아. ”
    “ 솔직히 말할까? 나 그 애 보는 순간, 그 애가 나랑 ‘빼쏘다’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로 닮았다고 느꼈어.
    그 애한테 욕구를 풀 수 없으니까 날 만나는 거 아니야? 말 해봐. 아니라고 말 해봐. 결코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겠어? ”
    “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 ”
    “ 잘 알아. 나 너 만난다고 이때까지 만나던 여자들 다 접었어. 나 좋다고 쫓아오던 유하도 자주 무시했어. 난 내 모든 걸 다 버리고 널 만났는데, 넌 날 위해서 그럴 수 있어? ”


    순간 머릿속마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날 직시하는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렌즈를 빼서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가 살짝 붉게 변한 듯 보였다. 내가 한참을 멍하게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자,
    그 아이는 내 품 속에서 빠져나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재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 하,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대체. ”























    쫓아가야 했지만 막상 일어나려 하니 무언가 날 잡는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냥 그대로 침대위에 누워 있을 수밖에.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 역시 천장과 같이 하얗게 변해버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쫓아가야 하는 건가…….
    내가 정말 그 애를 현화와 비교했던 건가. 현화를 가질 수 없기에 그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그저 머릿속이 복잡하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 아이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그 아이를 잡아 물어 보지 않으면 평생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 역시, 따라가 봐야 하는 거겠지. ”


    막상 밖으로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네온사인 아래엔 유진과 같은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렇지만 그 많은 아이들 중 내가 찾는 그 아이는 없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번외가 주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
    밝은 불빛을 거부라도 한 듯 유난히 어두운 그곳, 왠지 아까 그 아이의 눈빛과 어울리는 그 곳에 그 아이가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나를 만나기 전과 같이 그 아이가 좋아하는 초콜릿과 사탕을 들고 있는 싼 여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 정, 정시유진! ”
    “ ……너 왜 여기 온 거냐. ”
    “ …… 주인 찾으러 온 거다! 아직 잡아먹지도 못 했는데 이대로 가 버리려고? ”
    “ 바보, 사라져. 난 네 부인의 대리가 아니라고. 부인이 좋다면, 좋다고 말하지 그래? 더 이상 날 통해 대리만족 하지 말고 말이야. ”

    “ 너 자격지심이냐? 왜 네 자신에 자신감을 못 가지는데! 너는 너고 그 애는 그 애잖아! 내가 말했잖냐.
    나랑 그 애는 10살 차이난다고. 근데 너랑은 8살 차이난다고. 너 2년을 엄청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2년이면 그동안 먹은 밥그릇 수만 해도 이천백구십 그릇이다. 그리고 같은 하늘아래, 같은 땅 위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750일이다.
    너랑 나는 그 시간만큼이나 더 현화보다 함께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이런데도 내가 널 그 아이보다 더 아끼지 않는다는 이유를 든다면, 그게 바로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


    달려오는 바람에 숨이 차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길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이렇게 멋들어지게 말했지만 실제 그 아이가 진정으로 듣고 싶어하는 말은 전혀 하지 못했다.
    ‘현화보다도 더 너를 사랑한다고. 아니 설령 내가 예전에 그 아이를 사랑했었다 해도,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한다.’ 라고.
    그 아이의 회색빛 눈동자가 빛났다. 눈 아래가 붉어졌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내가 아끼는 너에게…….
    난 높이 쌓아올린 나무판자 위에 앉아있는 그 아이를 들어내려 품에 안으며 바보같이 이 말밖에 하지 못했다.


    “ 그리고 주인님이 없는 노예는, 정말로 족쇄를 풀고 달아나 버릴 지도 모르니까 잘 관리해야 한다. ”
    “ 바보, 성격 변한 건 어쩔 거야. ”
    “ 이제부터는, 너 때문에 성격 변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주인님.”
    “ ……차라리 예전 성격이 더 나았어.”


    역시 화내며 버둥거리는 유진. 그래도 왠지 기쁜 마음에 버둥거리는 유진을 보쌈질해 빛나는 네온사인을 배경으로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다시 도착한 오피스텔 앞.

























    “ 야, 안 힘드냐? ”
    “ 어깨 빠지는 줄 알았네요. 이만 들어가 봐라. ”
    “ 같이 안 들어가? ”
    “ 오늘은 왠지 안 내킨다. 너도 마음 뒤숭숭한데 내가 건드려봤자 좋을 거 없을 것 같고 말이야. ”
    “ 그래, 잘 가. ”
    “ 문자한다. ”


    그 아이를 그렇게 집까지 데려다 주고 오랜만에 진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파트 앞에서 집 창문을 보니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거의 모든 집의 불이 다 꺼져있는데 제일 꼭대기에 있는 집에 불이 켜져 있으니 왠지 등대같이 느껴졌다.
    물론 그 등대는 날 위해서 밝히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시간이 1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잠자고 있지 않은 걸까.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득 ‘15’ 버튼을 누를 뻔했다.


    “ 얼마나 집에 자주 안 왔으면 몇 층인지도 헷갈리는 건가. ”


    이번엔 제대로 ‘20’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는 움직였다. 문득 거울을 쳐다보았을 때 땀범벅에 흐트러진 유현빈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 상태로 가면 왠지 그 아이가 싫다는 눈빛으로 쳐다볼까봐 안경을 다시 깨끗하게 닦고,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시 가다듬었다.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2005’호 앞에 섰다. 내가 이 문을 과연 열어도 되는 걸까.
    거의 한 달 만에 들르는 ‘우리’ 집. 이젠 ‘우리’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그 아이 혼자 사는 집이 되어버렸다.
    아까 불이 켜져 있었지. 초인종을 눌러도, 내 얼굴을 그 아이가 봐도 과연 문을 열어 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한번 눌러 보았다.





















    ‘딩동-’


    오늘따라 유난히 초인종 소리가 크게만 들렸다. 그 큰 소리가 아파트 층계에 울려 퍼졌다. 인터폰으로 내 얼굴을 확인한 걸까.


    ‘달칵-’


    “ 어라, 오늘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 ”
    “ 도망 온 거지. 아직까지 안자고 뭐했어? ”
    “ 잠이 안 와서. 습관이야. 항상 2시 가까이 돼서 잠들거든. ”


    살짝 눈초리를 올리듯 웃으며 말하는 현화. 왠지 어색했다.
    아내의 습관도 모를 정도로 집에 안 들어오는 남편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그 아이.
    신발을 벗고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느낌에 그대로 잠들 뻔 했다.


    “ 배고프지 않아? ”
    “ 아니, 혹시 아직도 전에 사둔 와인이 남아있나? ”


    아무 말 없이 와인을 한 잔 건네며 내 옆에 앉는 현화. 우리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조차 켜지 않은 집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난 아무 말 없이 와인을 들이켰고, 현화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 평소에도 이렇게 조용히 지내는 건가? ”
    “ 응. 전에 만났던 수학선생 알지? 아, 현빈씨랑도 아는 사이인가?
    무튼 그 인간이 나한테 부탁하는 자료가 많아서 말이지. 거절한다면 거절할 수도 있는데 왠지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잠이 안 올 때는 그 자료 작성하곤 해요. ”
    “ 현석형이 좀 빡빡하긴 하지. 우리 현화, 고생이 많네. ”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날 보며 내가 쓰다듬은 자리를 살짝 문지르는 현화. 다시 한 번 흐르는 침묵.
    그런데 나 왜 여기로 온 거지? 정말 유진 말대로 나 이 아이를 인식하고 있는 건가.
    갈 곳이 없다면 회사로 갈 수도 있었고, 회사가 아니라면 하루정도 잠 잘 수 있는 호텔을 선택했어도 되는데 왜 나 이곳으로 온 걸까.
    유진의 말이 맞다 해도, 오늘 난 이 아이를 택할 수 없다. 나 이제는 내가 왜 여기 올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자각시켜주기 위해, 내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이미 알아버렸으니까.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을지라도 분명 현석형 이야기를 할 때 살짝 들뜬 모습을 알아채버렸으니까.
    나 왜 빨리 자각하지 못했을까.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이 아이를 택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왠지 오늘따라 그 아이의 검은빛 머리카락이 더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야.





























    “왜, 왜이래? ”


    그 아이의 긴 머리카락에 살짝 입 맞추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그 아이의 향기를 맡았다. 눈앞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가질 수 없는 걸까.
    유진과는 다르게, 살포시 그 아이를 품에 안았다.


    “ 하, 하지 마, 갑자기 왜이래?”


    얼굴이 붉어진 채 발버둥치는 그 아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늘 밤만은 그 아이를 느끼고 싶었다.
    좀 더 강하게, 살포시 그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 아이의 가픈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이마, 코, 그리고 입으로 내 입술을 옮겨갔다.
    잠시 발버둥 치더니 이내 잠잠해지는 현화.
    그 순간 그 키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키스가 아닌, 성스러운 의식에서 받는 세례같이 느껴졌을까.
    내가 살짝 입을 떼자 내 볼을 어루만져주는 그 아이. 볼을 어루만진 그 하얀 손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나 울고 있었던 걸까. 그 아이는 나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리고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 내가 이런 행동을 해서 싫은가? ”
    “ 이유도 모르면서, 화내는 건 나쁜 행동이잖아. 놀라긴 놀랐어. 결혼식장에서도 해주지 않았던 키스를 지금 갑자기 받았으니까. ”
    “ 나 너를 사랑했던 것 같다. ”
    “ 그래요? 좀 더 빨리, 다정하게 다가왔다면 나 역시 현빈씨를 사랑했을지도 몰라. ”

    “ 그렇지만, 나에겐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어. 그리고 너 역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원하고 있으니. ”
    “ 난 지금 아무도 원하지 않아. ”
    “ 현석형……이라고 말한다면 화낼 건가? ”
    “ 잘 모르겠어. 하지만……그 사람 따로 사랑하는 사람 있어.
    내가 설령 그를 사랑한다 해도, 그는 날 선택하지 않을 것을 아니까.
    내가 언젠가 자각하게 되더라도 평생 비밀로 지키고 가려고 해. ”

    그 아이는 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자존심 강한 그 아이 성격에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
    나 역시 그 아이 품에서 조금, 아주 조금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나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닐까.
    그 아이를 한 순간이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기에.
    왠지 그 아이가 내 전부 중 유일하게 좋아하던 왼쪽눈동자가 아려오는 것 같았다.


























    ‘따르릉-’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니 8시가 다 되어있었다. 일어나 보니 어제 그대로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현화는 먼저 학교에 간 걸까. 내 위에는 그 아이가 덮어주고 간 듯한 담요가 있었다.
    소파 옆 테이블에 놓여있는 안경을 쓰고 부엌으로 갔다. 위에는 간단하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아침식사가 있었다.
    처음으로 부인에게 얻어먹어보는 아침.
    오랜만에 식사를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뒷정리를 하고 집을 나섰다.


    「 바보, 오늘 올 거야? 」
    「 그래, 주인님. 오늘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
    「 ……도망가 버릴까보다. 」


    유진의 문자. 왠지 편하다. 내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
    보금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에.


    “ 하아……. ”


    나의 첫 사람, 현화. 그 아이는 내가 예전에 텔레비전으로 보며 동경했던 메텔과 닮아 있었다.
    영원의 연인. 결코 잡을 수 없는 환상의 연인.
    그러나 난 이미 어른이고, 더 이상 환상 속에 빠져있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제 나 그대를 떠나려고 해.
    그래, 나의 연인, 이젠 영원히 안녕.
    나 이젠 어른이 되려고 해.
























    --------------------------------------------------
















    이번편도 나름 길게 썼다고 자부해여
    무튼 현빈편입니다.
    흑흑 오늘 드디어 유쨩 만나러가여
    출발하기 5분남았네여 (.......)
    무튼 현빈편입니다. 다음편은 누구편일까요.





    ( 이건 여담인데요
    친구가 내 소설 보고 강도가 약하다나........
    더 세게 나가야 하나요
    만약 사람들이 많이 동의한다면
    친구도움받아서라도 세게 나가볼께요 . )




댓글 4

  • 세츠군z

    2007.07.16 15:06

    오오오오메텔이래푸하하하
    나순간현화를메텔닮았다고하는줄알았어<
    /ㅅ/주인님소설짱좋아흐흐흐흐흐
    우리자기얼른컴언<
  • [레벨:24]id: Kyo™

    2007.07.16 17:43

    헤에, 아련하구나ㅡ
    이래저래 고생 많았네, 현빈씨ㅡ
    첼, 화이팅~!!
  • [레벨:3]감귤〃

    2007.07.17 00:05

    꺄하 , 오늘 재밌었음 //ㅅ
    마막 현화 좋은거야 ?♡
    재밌었어요 ! 
  • [레벨:6]id: 원조대왕마마

    2007.07.23 15:18

    와아아아,!!길다아아아아!!<-타아앙
    와와와, 멋있어어//ㅅ
    이정도면 강도 괜찮은데... (중얼)
    무튼.. 그럼 현화가 현석이 좋아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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